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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장 류모세
경희 샬롬 한의원 원장
열린다성경아카데미 대표
온누리교회 협력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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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BS 아카데미 숲 / 류모세 목사의 열린다 성경
     

  • CGNTV
    류모세 강의 모음 유투브 채널

  • GODpeople
    성경, 체질 그리고 건강

약력

  •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졸업(BA)
  • •히브리대학교 의과대학 세포생리학 졸업(MA)
  • •히브리대학교 의과대학 약리학 졸업(Ph.D)
  • •횃불트리니티신학원대학교 신학과 졸업(MTS)
  • •(전) 온누리교회 이스라엘 파송 선교사 10년
  • •(전) 강남백병원 한방과장
  • •(현) 열린다성경 아카데미 대표, 경희 샬롬 한의원 원장
  • •(현) 온누리교회 협력목사
  • •CGN, CTS, C-channel, 극동방송 등 다수 기독교 방송 출연

저서

  • •열린다 성경(전7권)
  • •열린다 비유(전3권)
  • •역사드라마로 읽는 성경(전6권)
  • •이슬람 바로보기, 유대인 바로보기
  • •열린다 성경 난해구절(규장)
  • •체질을 알면 사람이 보인다(고려원)

•<성경, 체질, 그리고 건강>을 주제로 연구하게 된 계기는?

‘성경’은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주어진 영원한 숙제요, ‘건강’은 신자, 불신자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을 사로잡는 영원한 테마입니다.

성경, 체질, 그리고 건강!

어찌 보면 그다지 상관없을 것 같은 이 3가지 주제의 연관성에 대해 관심을 갖고 연구하게 된 데는 나름의 계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별난 세계를 살았던 저 자신만의 독특한 신앙 여정에서 비롯됩니다.

저는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University Bible Fellowship)라는 선교단체를 통해 대학교 1학년 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 단체는 줄여서 ‘UBF’라고 불렸지만, 대학가에서는 통상 이 단체의 독특하고 폐쇄적인 성격으로 인해 ‘UFO’란 별명으로 더 유명했습니다.

귀납법적 접근을 통한 일대일 성경공부와 절대복종을 강조하는 제자 양육은 이 단체를 특징짓는 모토였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군 복무의 시간까지 합쳐서 총 8년의 시간 동안 성경을 공부하고 가르치며 일반적인 대학생활과는 거리가 멀게, 그것도 너---무 멀게 보냈습니다.

그곳에서 전도를 위해 거의 매일 사람을 만나고, 일대일로 성경을 가르치고,
여름수련회 때면 비닐하우스를 개조한 듯한 허름한 수양관에서 수백 명의 대학생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 진솔하고 적나라한 간증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곳에서의 독특한 경험들이 쌓이면서 제 마음 속에는 이런 궁금증이 생겨났고 궁금증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강해졌습니다.

‘어쩌면 사람들이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게 사람이라지만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네. 무엇보다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는 접촉 포인트도 신기할 정도로 다르지 않은가?’

비록 남들에게는 UFO로 놀림 받지만 저는 그곳 UBF에서 예수님을 뜨겁게 만났고 내가 만난 예수님을 일대일 성경공부를 통해 후배들에게 열심히 전했습니다.

하지만 일대일 성경공부는 종종 논쟁을 넘어 주먹다짐만 안 했다 뿐이지 싸움 직전으로까지 발전했습니다.
내 딴에는 이 부분에서 분명히 은혜를 받고 주님을 영접해야 할 포인트라 여겨 목청을 높여 힘주어 가르쳤지만 많은 경우 후배들은 내가 강조한 부분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복음으로 섬기면서 하나님은 제게 사람에 대한 궁극적인 관심과 고민을 주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천차만별의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하던 제게 한의대 본과 3학년 때 배우게 된 사상의학은 그야말로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지금부터 100여 년 전에 살았던 이제마 공(1837-1899년)에 의해 쓰인 <동의수세보원>은 허준의 <동의보감>과 함께 한의학의 역작으로 꼽힙니다.

많은 경우 사상의학을 체질에 따라 음식을 가려먹거나 보약을 짓는 정도의 가벼운 흥밋거리로 생각하지만,
이제마 공의 <동의수세보원>은 사람에 대한 이해를 다룬 인간학의 최고봉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몸과 마음을 한데 아우르는 전인 건강학을 표방한 최고의 의학이었습니다.

<건강이란 다만 질병이 없거나 허약하지 않다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완전히 안녕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을 말한다.>

이 말은 1948년 세계보건기구(WHO) 헌장에서 정의한 건강의 개념입니다. 건강은 단순히 평균 수명의 연장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육체적 건강, 정신적 건강, 사회적 건강을 포괄하는 전인적(全人的) 건강이야말로 참된 건강의 개념일 것입니다.

건강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갖가지 병리적 상황을 낳게 마련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웅담, 곰 발바닥, 뱀탕을 찾아 떠나는 동남아 추태 보신 관광입니다.

급속한 산업화가 가져온 경제적 풍요는 우리에게 육체적 건강을 선물로 안겨 주었지만, 정신적 건강의 피폐라는 뼈아픈 대가를 톡톡히 치르도록 했습니다.
나와 내 가족만 건강하게 잘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 또한 잘못된 건강 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국민의 건강을 책임진다는 의료인들 역시 사회적 건강의 개념을 잊고 있다는 점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한방과 양방이 이원화된 의료체계 속에서 환자들은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지 곤혹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의사들은 한약을 먹으면 간이 나빠진다고 겁을 주고, 한의사들은 독한 양약보다는 한약을 먹어야 몸에 좋다고 말합니다.

<전인 건강>에 대한 개념 정립이 시급한 이때에 저는 100년을 앞서 살다 가신 이제마 공을 떠올립니다.
그가 새롭게 창시한 사상의학(四象醫學)은 사상철학(四象哲學)에 바탕을 둔 전인건강학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점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합니다. 체질의학을 그저 체질에 맞는 음식이나
한약을 골라 먹는 식이요법 또는 보약론 정도로 아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이제마 공이 알면 얼마나 탄식할까요!

저는 강의와 홈페이지의 풍성한 정보들을 통해 참된 건강의 개념으로서 전인 건강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아울러 세간에 유행을 일으키고 있는 체질의학이 바로 전인 건강학임도 주장하고 싶었습니다.

이것을 위해 사람들의 입에 널리 오르내리는 정치적 사건과 정치인들, 사회 저명 인사, 성경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을 <체질>이라는 돋보기로 조명해 본 것입니다.
더 나아가 크리스천 한의사로서 성경적 관점에서 바라본 체질론과 건강론을 제시하고 싶었습니다.

“인간은 천부적으로 물려받은 장부허실(臟腑虛實)이 있고 사람마다 각기 체질이 다른 만큼 그 체질에 맞는 약을 써야 한다.
나는 이것을 옛사람들이 전해 온 저술과 나의 오랜 경험 및 연구를 통해 발견했으며,
내가 죽고 난 백 년 후에는 반드시 사상의학(四象醫學)이 사람들에게 널리 쓰이는 시대가 올 것이다.”
<사상의학 창시자, 이제마 공(公)(1837-1899)>

•이스라엘에 첫 발을 내딛다

1년에 6만 명가량의 한국 성도들이 성지순례로 다녀가는 곳, 이스라엘. 2000년 2월 26일, 나는 이곳에 첫발을 내디뎠다.
4살짜리 아들 찬영이와 10개월 된 딸 현지,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였다.
우리는 이스라엘에서 11년을 살면서 이곳을 제2의 고국처럼 여겼다. 특히나 현지는 너무 어릴 적에 와서 이스라엘에서의 삶이 인생의 전부였고, 찬영이는 자신을 유대인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다보니 아이들에게 한국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가르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 이곳에 왔을 때 핏덩이였던 현지도 어느새 유치원을 거쳐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의 삶과 내공도 점점 깊어져갔다. 한번은 한국에서 가깝게 지냈던 집사님이 이스라엘에 성지순례를 오셨는데, 그 분은 우리 가정을 무척 부러워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의 흔적이 살아 숨 쉬는 이스라엘에서 사시니 정말 부러워요!”

성지순례를 통해 한참 은혜를 받아서인지 집사님은 이스라엘, 그것도 예루살렘의 공기를 마시며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정말 큰 축복이요 은혜라 여기신 것 같았다.
나는 약간은 들떠서 말씀하시는 집사님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성지로서 이스라엘이 주는 감동은 딱 일주일뿐입니다. 그 뒤로는 광야에서의 치열한 생존이 기다리고 있지요.”

정말이지 이스라엘에서의 삶은 치열했다. 우리 가정이 이스라엘에 도착한 지 불과 6개월밖에 되지 않았을 때였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
동예루살렘을 수도로 독립 국가를 세우려는 팔레스타인 측과 이를 저지하려는 이스라엘의 힘겨루기인 인티파다(Intifada, 팔레스타인 민중 봉기)가 시작된 것이다.
이 기간을 1987년 가자(Gaza)에서 일어난 제1차 인티파다에 이어서 제2차 인티파다라고 부른다.
시내버스가 폭파되고, 예루살렘 시내의 유명한 커피숍과 피자 가게 등 사람들이 제법 모일 만한 곳을 타깃으로 한 무차별 자살폭탄테러가 일어나면서 상황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그야말로 집 말고는 안전한 곳이 없었다. 심지어 히브리대학교의 구내식당에서도 테러가 일어나 한국인 유학생 3명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다치기도 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언론의 해외토픽 란에나 나올 법한 사건들이, 이스라엘에서는 한 주가 멀다 하고 눈앞에서 펼쳐졌다. 이런 현실에 우리는 무척 당혹스러웠다.
바로 전날에 아내와 함께 장을 보러 간 동네 슈퍼마켓에서도 폭탄테러가 일어났다.
10년 넘게 슈퍼마켓 앞 공터에서 나물 장사를 하던 아랍 할머니가 온몸에 폭탄을 감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계산대로 돌진한 것이다.
알고 보니 이스라엘 군인들의 베들레헴 진격 작전 중 희생된 아들의 복수를 감행한 것이었다. 안타까운 마음도 잠시, 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자살폭탄테러는 그 후로도 5년간이나 이스라엘 - 팔레스타인 갈등의 핵심인 예루살렘에 집중되었다.
한번은 아이들과 아침 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어디에선가 펑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창틀이 심하게 흔들렸다.
지진이 난 줄 알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집 근처 버스정류장에서 일어난 자살폭탄테러였다.
초등학교 등교 시간에 일어난 일이라 정류장 근처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아이들의 시체와 책가방과 학용품들이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너무 끔찍하고 참혹했다. 지옥이 아마 이런 모습이 아닐까….
또 한번은 테러 현장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인데도 불구하고 별다른 외상도 없는 사체가 발견된 적이 있었다. 부검 결과 마치 총알을 맞은 것처럼 심장에 나사못이 박혀 즉사한 것이었다.
테러범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살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온몸에 폭탄과 함께 볼트, 너트, 나사못 등을 칭칭 감은 후 폭파시켜,
테러 현장에서 꽤 떨어진 곳을 걸어가던 사람을 희생자로 만들었다.
이렇듯 이스라엘에는 늘 테러의 위험이 있다. 그래서 테러가 발생했다는 뉴스 속보가 뜨면 약 30분 정도 핸드폰이 불통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뉴스를 본 유대인들이 가족의 안전을 확인하기 위해 핸드폰을 동시다발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위험에 처해 있기 때문에 한가롭게 드라마를 볼 여유도 없다.
이집트, 요르단, 이란 등 중동 지역을 강타한 한류 열풍이 이곳 이스라엘에서만은 유일하게 불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드라마보다는 뉴스에 주목하고, 매시간 단위가 아니라 30분마다 뉴스가 방송되는 곳, 언제 터질지 모르는 테러 관련 속보가 수시로 발송되는 곳이 바로 이스라엘이다.

•한의사로 유대인들에게 다가가다

나와 아내는 먼저 히브리어를 배우기 위해 당장 ‘울판’(Ulpan)이라고 불리는 랭귀지 코스에 등록했다. 장모님이 어린 두 아이들을 돌봐주셨기 때문에 아내도 시간을 낼 수 있었다.
울판은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과 함께 중국, 아르헨티나, 에티오피아, 미국, 러시아 등 전 세계에서 귀환한 유대인들이 한데 모여
그들의 모국어인 히브리어를 배우는 곳이다. 한마디로 ‘전 세계의 축소판’이라 불릴 만했다.
재미난 것은 중국에서 온 유대인들은 외모만 놓고 보면 영락없는 중국인이었고, 에티오피아에서 온 유대인들은 영락없는 아프리카 흑인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이 아무리 유대인이라 하더라도 조상 때부터 수백 년 동안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면서 혼혈이 되었기 때문에 어느덧 외모도 현지인처럼 변해버린 것이다.
나와 아내는 틈나는 대로 울판에서 사귄 친구들을 한 명씩 집으로 초대했다. 그리고 김밥, 잡채, 떡볶이, 불고기 등 맛있는 한국 음식을 대접하며 교제를 나누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그러셨듯이 우리도 그들과 함께 먹고 서로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초대했던 사람들 중에 잉그리드라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유대인 자매가 있었다.
그녀는 정통파 종교인 부모 밑에서 자라났는데도 완전한 세속주의자였고, 여느 유대인들처럼 기독교인들을 무척 싫어했다. 하지만 우리 가정을 방문할 때면 알 수 없는 사랑을 느낀다고 고백했다.
우리는 그렇게 초기 2년간은 사역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고 오로지 언어 훈련에만 매진하고자 마음먹었다.
이것은 선교 훈련을 받을 때 귀가 따갑게 들었던 가르침이기도 했다. 괜히 언어도 안 되는 상태에서 사역부터 하겠다고 초기 2년을 어정쩡하게 보내면,
이후 사역에 더욱 집중해야 할 때 언어 때문에 고전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나의 계획은 전혀 예기치 않은 상황 때문에 틀어져버렸다. 매일 5시간씩 주 5회 공부하는
히브리어 인텐시브 코스는 집에서도 적지 않은 시간을 투자하여 복습해야 간신히 따라갈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한국에서 한의사가 왔다는 소문을 들은 한인들이 치료를 받기 위해 나를 찾아왔고, 나중에는 한인들로부터 소개를 받은 유대인들까지 몰려오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중국과의 오랜 외교 관계로 침술에 대한 인지도가 무척 높았고 자체적으로 2년 코스의 한의과 대학도 세 곳이나 있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유대인 한의사의 실력을 그다지 신뢰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지 한의학의 본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에서 정통 한의사가 왔다는 소식을 들은 유대인들이 존경심과 경외심(?)을 안고 나를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환자들을 치료해주다보면 그날그날 해야 할 숙제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날이 많이 생겼다. 초반의 계획이 틀어지자 나는 마음이 어려워졌다.
그래서 이 문제를 놓고 하나님의 뜻을 구했을 때 하나님은 내게 이런 마음을 부어주셨다.

“네가 선교사요 사역자이기 이전에 한의사가 아니냐? 의사가 어떻게 자신을 찾아오는 환자를 뿌리칠 수 있겠느냐?”

나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환자 치료와 울판 과정을 병행해나갔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하나님은 예기치 않은 축복을 주셨다.
히브리어 수업을 끝내고 난 뒤 집으로 찾아온 유대인 환자들을 진료하기 위해 유대인들과 대화하는 가운데 울판에서 배운 히브리어를 날마다 실습하고 적용하다보니
히브리어 실력이 일취월장하게 된 것이다. 비록 간단한 회화이지만, 나는 이스라엘에 온 지 두 달 만에 시청에 가서 용무를 볼 수 있을 정도로
히브리어를 구사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모든 외국어 공부가 그렇듯이 교실에서만 배우는 공부는 반쪽짜리밖에 되지 않는다.
나머지 반쪽은 교실에서 배운 수많은 어휘와 표현들을 현지인과 섞여 살면서 실제로 써보아야 한다.
내게 그런 소중한 기회가 자연스레 주어졌던 것이다. 유대인 환자들을 돌보았을 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은 단지 히브리어 실력이 자라나는 데만 있지 않았다.
한국인으로서 이스라엘에서 생활하다보면 어쩐지 주변을 맴도는 아웃사이더 같은 느낌을 피할 수 없다.
그런데 그들과 직접 대화하고 교제하면서 조금씩 이스라엘 사회와 그들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었고,
그동안 책을 통해서만 읽은 선교지 이스라엘에 대한 수많은 정보들을 폭넓게 배울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최초의 유대인 환자 다비드 코헨 이야기

한국에서는 침보다 한약을 위주로 치료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한약의 활용이 용이하지 않다.
유대인들이 쓰디쓴 한약을 먹지도 않을뿐더러 침술은 치료로 인정하지만 한약은 건강식품 정도로밖에 인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침술을 통해 환자들을 치료했다.
침술을 통해 복음을 전하기 위해 노력하던 그때, 침술에 대한 오해를 받아 난감한 적도 있었다. 내가 하는 침술이 뉴에이지(new age) 치료가 아니냐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뉴에이지가 거의 신드롬이라 할 정도로 기승을 부렸다. 각종 테러와 전쟁이 끊이지 않다보니 유대인들은 뉴에이지 계통의 요가, 명상, 기공 등으로 마음의 안식을 찾고자 했고,
여기에 심취한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정기적으로 뉴에이지 페스티벌까지 열리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이스라엘 교회의 리더십들도 뉴에이지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다니던 유대인 교회에서도 내가 하는 침술이 뉴에이지 치료가 아닌지 물어온 적이 꽤 많았다.

당시 텔아비브에 사는 조야라는 친구도 내게 전화하여 이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는 러시아에서 귀환한 유대인으로 마사지와 침술을 병행하여 치료하는 클리닉을 운영하면서 복음도 전하는 참으로 귀한 기독교인이었다.
그런데 조야가 다니는 유대인 교회에서 그가 하는 치료법이 뉴에이지 치료법이고 비성경적이니 절대 그곳에 가지 말라고 부추기는 바람에 곤란을 겪게 되었고,
자기 직업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열심히 사명을 감당하던 조야는 몹시 낙심해 있었다.
나 역시 겪었던 일이었기에 나는 그 일로 힘들어하는 조야가 안쓰러웠다. 나는 그를 다독이며 이렇게 설명해주었다.

“조야, 침술은 현대의학이 발달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중국 사람들을 통해 주신 무척 요긴한 치료법이야. 물론 동양의 음양오행 이론에 기초하고 있지만,
그 출발부터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해 생겨난 뉴에이지 사상과는 전혀 달라. 침술은 가치중립적인 도구일 뿐이지. 누가 칼을 들고 이것이 성경적인지 비성경적인지 묻는다고 생각해봐.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 강도의 손에 들린 칼은 사람을 죽이는 흉기가 되지만 요리사의 손에 들린 칼은 훌륭한 조리 도구가 되는 것처럼 침술도 마찬가지야.”

나는 조야가 하는 사역을 마음껏 축복해주었다.

이스라엘의 특별한 선교적 상황에서 내가 하는 침술은 유대인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효과적인 접촉점이 되어주었다.
내가 만약 한의사가 아니라 일반 의사였다 해도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여타의 선교지들이 대부분 의료 수준이 열악한 제3세계인 것에 비해 이스라엘의 의료 수준과 보험 체계는 세계에서도 첨단을 자랑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의사로서의 특수한 나의 재능은 이방인 사역자가 이스라엘 사회에 침투할 수 있는 효과적이고 전략적인 무기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최초로 내게 찾아온 유대인 환자의 이름은 다비드 코헨이었다. 그는 예루살렘 시청에 소속된 청소부로 평소 불면증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다비드는 매주 두 차례 치료를 받으러 왔는데,
내가 치료비를 받지 않자 치료를 받으러 올 때마다 쌀을 비롯해 여러 선물을 가지고 오곤 했다.
한번은 오랜 기도와 준비 끝에 유대인 전도자 라헬과 함께 다비드에게 복음을 전했다. 무려 두 시간에 걸쳐서 영적 혈투가 벌어졌다.
다비드는 앉았다 일어났다 하거나 방을 들락날락하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선포된 복음 앞에 두려움과 호기심이 생겼는지 주일에 있는 다니엘서 성경공부 모임에 오기로 약속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다음 날 치료를 받으러 온 다비드는 복음을 들은 지난 밤에 너무 두려운 나머지 한숨도 못 잤다고 털어놓으며
자신은 ‘코헨’(제사장)의 피가 흐르는 가문이기 때문에 절대 예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면서 내게 양해를 구했다.
한인들의 소개로 온 경찰관 말리도 유대인 환자 중 한 명이었다. 40대 노처녀인 그녀는 우리 가정을 무척이나 아껴주었는데, 그래서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아 있다.
그녀는 메노 목사님이 인도하시는 다니엘서 성경공부에도 참석하고, 요셉 슐람 목사님이 시무하는 네티비야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이라크 랍비 출신인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쳐 중단되곤 했다.
나는 언어 훈련과 더불어서 유대인 환자들을 치료하고 그들과 교제하면서 부족하지만 짧은 히브리어만으로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때로는 열정적인 유대인 사역 팀과 동역하며 조심스럽게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하지만 오랜 시간 기독교인들로부터 받은 상처 때문에 마음밭이 길가와 같이 굳어져 있는 유대인들에게서 당장은 열매를 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낙심하지 않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담대히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히브리대학교 의과대학에 지원하다

한국과 이스라엘 간에 맺어진 비자 협정으로 한국인에게는 이스라엘 입국과 동시에 자동으로 3개월 관광 비자가 주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이후 장기 체류를 하려면 정식으로 학교에 등록하고 학생 비자를 받아야만 한다.
관광 비자가 만료되고 울판 과정으로 비자를 한 번 갱신한 나는 안정적인 학생 비자로 전환하기 위해 히브리대학교 의과대학 석사 과정으로 지원서를 냈다.
각 교실의 책임 교수님들에게 모두 자기소개서를 보내고 난 뒤 초조하게 답변을 기다리고 있을 때, 메일 하나가 도착했다.
세포생리학 교실의 책임 교수님인 아셀 오노이 교수님이 나를 학생으로 받아준 것이다.
그런데 막상 학교에 등록하려고 보니 문제가 있었다. ‘석사 과정’이 아니라 ‘석사 준비 과정’인 것이 아닌가.
요컨대 한국에서 공부한 6년의 과정은 히브리대학교 의과대학의 커리큘럼과 많이 다를 뿐만 아니라 이미 배운 과목이 있더라도
벌써 10년이나 흘러 학문이 많이 바뀌었으니 우선 소정의 준비 과정부터 이수하라는 뜻이었다.
정식으로 석사 과정에 등록하기 위해서는 한국에서 전혀 배우지 않은 면역학, 분자생물학을 포함해서 총 7개 과목으로 27학점을 이수해야 했다.
또 다른 문제도 있었다. 대체로 석박사 과정의 수업은 시험을 보지 않고 세미나 발표나 페이퍼로 점수가 주어진다.
그런데 석사 준비 과정의 7개 과목은 모두 학부 과목이기 때문에 학부생과 함께 수업을 듣고 중간고사와
기말고사까지 모두 봐야 한다. 게다가 정식으로 석사 과정에 등록하기 위해서는 모든 과목에서 무조건 75점 이상을 받아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다시 말해 만약 한 과목에서 74점을 받았으면, 나머지 과목 모두 100점을 받아도 자동 탈락이 된다는 말이다.

‘내가 과연 석사 준비 과정을 끝내고 본 과정으로 올라갈 수 있을까?’

나는 갑자기 하늘이 노래지는 것을 느꼈다. 솔직히 이 조건을 충족시킨다는 것이 내게는 거의 미션 임파서블이었다.
이것은 마치 한국에 유학 온 외국인이 1년간 언어를 배운 다음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수업을 듣는 것과 같다. 당시 내가 처한 상황이 정확히 그랬다.
게다가 아셀 교수님은 매일 실험실에 나와 자신이 하는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라는 추가적인 미션까지 주었다.
나는 이 미션을 감당할 수 있을지 테스트하기 위해 첫 학기에 한 과목만 신청한 후 아셀 교수님의 ‘임신 중 당뇨가 기형아 출산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히브리대학교 학생으로서의 새로운 생활은 이렇게 엄청난 부담과 두려움을 안고 시작되었다.
예상은 했지만 새롭게 시작된 학생으로서의 생활은 내가 따라가기에 결코 수월하지 않았다. 울판에서 히브리어를 배우는 것과 학교에서 히브리어로 수업을 듣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전문 용어를 사용하며 빠르게 진행되는 의대 수업은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어서 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고역이었다.
특히 한 과목을 1년 동안 공부하는 한국과 달리 이스라엘에서는 1학기에 모두 마치기 때문에, 수업 시간에 나가는 진도의 양이 어마어마했다. 다른 학생들은 열심히 필기하면서 많은 양을 정확히 소화했지만,
나는 그저 교수님만 멀뚱멀뚱 바라볼 뿐이었다. 수업이 토론으로 진행될 때도 참여하기는커녕 그 내용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수업 시간 내내 교실 맨 뒷자리에 앉아 한숨만 푹푹 쉬어대며 앞날을 염려했다.

‘과연 내가 이 과목을 통과할 수 있을까?’

시험 유형이 철저히 객관식이라는 데 더 마음이 어려웠다. 차라리 서술형 시험이라면 아는 만큼만 쓴다고 하지만,
객관식 시험은 답을 확실히 알지 못하면 맞추는 게 불가능했다. 답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 고르는 문제가 많아 어림잡아 알아맞히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히브리 의대에서 각 과목당 학생들의 평균 점수는 대략 60점에서 65점 정도였다. 유대인들도 이런 점수를 맞는데,
수업을 전혀 따라가지 못하는 내가 각 과목에서 75점 이상의 점수를 맞는다는 게 과연 가능한지, 하루에도 몇 번씩 포기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나는 아내에게 이런 내 심정을 수도 없이 토로했다.

“여보, 아무래도 학생으로 비자 받는 것은 깨끗이 포기해야 할 것 같아. 차라리 지금 당장 다른 쪽을 알아보는 게 어떨까?”

이스라엘에서도 침술이 인기가 있으니 취업 비자를 받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에도 이미 한의과 대학이 세 군데나 있어서 유대인 한의사들이 충분히 공급되었기 때문에 외국인에게까지 취업 비자를 준다는 것은 솔직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내는 재시(再試)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으니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그때 가서 결정하자고 했다.

“일단 하는 데까지 죽을힘을 다해 해봐요. 기도할게요.”

나는 매일같이 들리지도 않는 수업을 듣기 위해 노력해야 했고, 실험실에 가서 매일 주어지는 실험 분량과 매주 연구 발표해야 하는 최신 논문을 붙들고 씨름해야 했다.
물론 이런 삶은 내가 이스라엘에서 감내해야 하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힘들기만 했다. 나는 모두 돌아가고 혼자 남은 실험실에서 나의 상황을 한탄했고,
특히 재시 준비를 할 때는 실험실 창밖으로 보이는 헤르 산을 바라보며 참 많이 울었다.그때 나는 알게 되었다. 이것이 나를 낮아질 수 없는 곳까지 철저히 낮추시는 하나님의 혹독한 훈련의 시간임을...

•결코 쉽지만은 않았던 학위 과정

나는 공부 하나는 자신 있었다. 한국에서도 그랬고 또 이스라엘에서도 절대 뒤처지지 않을 거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이스라엘에 오자마자 울판에 등록해서 히브리어를 공부하는 1년의 기간은 내게 정말 신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어느덧 교만이 되어버렸던 것 같다.
모두 다 포기하고 싶었던 그때, 내가 붙잡을 수 있는 분은 오로지 하나님뿐이었다.
하나님이 잠시라도 한눈을 파셨다면 광야를 지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려 죽거나 목말라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나 또한 그랬다.
하나님께서 나를 단련하고 시험하시던 그때 오직 하나님만 붙들고 나아갔을 때, 하나님은 필요한 도움의 손길을 붙여주셨다.
시험을 볼 때마다 친절한 학생을 한둘씩 붙여주셔서 깨끗하게 정리된 필기 노트를 얻어 공부할 수 있도록 해주셨고,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실험실에서 함께 일하는 친구를 통해 수시로 과외를 받을 수 있게 해주셨다.
그렇게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에 있던 대부분의 시간을 석사 준비 과정, 석사 과정, 박사 과정의 학생 신분으로 안정적으로 비자를 갱신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그리 쉽지만은 않았던 그 시간들을 통해 많은 축복을 허락하셨다. 우선 매일 학교와 실험실에서 유대인들과 생활하다보니 히브리어에 익숙해졌다.
울판에서 배운 히브리어가 이제는 어느덧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언어가 되어 대화도 수월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꿈에서도 히브리어로 말할 정도였다.
나는 점점 이스라엘 사회의 중심으로 편입되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유대인 교육을 삶에서 직접 경험하게 된 것 또한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주신 커다란 축복이었다.
두 아이는 시간이 흐르면서 이스라엘 유치원과 초등학교, 중학교에 다녔다. 한인들이 모여 사는 동네와는
멀리 떨어져 있다보니 아이들은 유치원 때부터 유일한 한국인을 넘어 유일무이한 동양인이었다.
유별나게 눈이 큰 유대인들에 비해 눈이 작고 옆으로 째진 눈매 때문에 아이들은 자주 중국인이라고 놀림을 받았다.
그런데도 꿋꿋하게 학교생활에 적응하며 친구도 잘 사귀고 잘 자라주었다.
이스라엘에서는 선생님이 일방적으로 지식을 가르치고 학생들이 그것을 암기해서 시험을 보는 식의 주입식 교육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유대인들의 교육 방법은 한마디로 토론식 교육이다.
이 토론식 교육은 유치원 때부터 시작된다. 이스라엘의 유치원에서는 선생님이 아이들을 모아놓고 늘 질문을 던짐으로써 학생들의 창의적인 대답을 유도한다.
이스라엘 속담에 “샬로쉬 예후딤, 아르바 데오트”라는 말이 있다. 세 명의 유대인이 있으면 네 가지 의견이 나온다는 말이다.
토론식 교육에 익숙한 유대인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확고한 의견이 있으며 이것을 관철시키는 자신만의 논리로 늘 무장되어 있다. 그중에는 확실히 창의적인 의견이 있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 명의 유대인이 의견을 말하면 세 가지 의견이 아니라 네 가지 의견이 나온다고 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공부 자체가 암기 위주의 주입식이 아닌 그룹별 토론과 발표와 연구 위주여서 그런지 이스라엘 학교에서는 숙제나 시험공부에 짓눌려 스트레스를 받는 학생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심지어 나는 우리 아이들의 시험 기간이 언제인지도 모를 정도였다.
학력 위주의 사회, 과도한 교육열, 암기 위주의 주입식 교육, 선행학습, 불야성을 이루는 학원가, 무너진 공교육,
오로지 대입을 목표로 한 무한경쟁은 한국 교육의 뼈아픈 현주소이다. 한국의 이런 교육 상황을 알기에 나는 이스라엘의 교육 시스템이 그야말로 별천지로 느껴졌다.

나 또한 히브리대학교에서 공부할 때 유대인 교육의 힘이 무엇인지 몸소 체험했다.
보통 한국에서는 의대 수업이 대부분 암기 과목이라고 여겨져서 시험공부를 할 때 누가 더 빨리 더 많은 분량을 암기하는지가 중요하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는 시험 자체가 오픈 북(open book)일 때가 많고 그만큼 창의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력을 요하는 문제가 출제된다.
일례로 나는 한국에서는 단순 암기 과목이던 생화학 시험이 이스라엘에서는 오픈 북 시험이라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오픈 북 과목 시험에서 도저히 점수를 얻지 못하는 나 자신을 보면서 내가 얼마나 암기와 주입식 교육에 젖어 있는지 깨닫게 되어, 창의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력을
묻는 그들의 의대 공부와 시험에서조차 도저히 넘기 힘든 벽이 느껴져 처절히 절망했다. 시험 기간에 삼삼오오 모여서 묻고 토론하던 학생들의 모습은 지금도 인상 깊게 남아 있다.

•체질 침으로 유대인 사회에 소문나다

메이탈이라는 친구와 친하게 지내게 된 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였다. 사실 메이탈과 가까워진 특별한 계기가 있다. 바로 내가 그녀의 어머니를 치료해주면서부터였다.
당시 메이탈은 침술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고 실험실에서 꾸준히 교제하면서 자연스럽게 내게 고민을 털어놓았는데,
이때 메이탈의 어머니가 간호사로 일하면서 10년 넘게 편두통으로 고생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학교생활을 하며 애를 먹을 때 메이탈은 매번 친절히 나를 도와주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나도 그녀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어머니를 모시고 우리 집에 한번 오라고 했다.
메이탈이 어머니와 함께 우리 집을 방문했을 때 나는 성심성의껏 메이탈의 어머니를 진단했다. 메이탈의 어머니는 전형적인 소양인이었다.
그래서 나는 소양인 체질에 맞는 침을 좌우에 네 개씩 총 여덟 개를 놓았다.
그런데 이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침을 맞자마자 편두통이 상당히 호전된 것이다. 그리고 이후로 세 번 정도 침을 더 맞자 그동안 편두통으로 항상 달고 다니던 진통제를 끊을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즐겨 사용하는 사상체질에 따른 사암침 요법은 정확한 진단이 이루어질 경우 신비할 정도로 좋은 효과를 보이는데,
하나님께서 메이탈의 어머니에게 그런 역사를 이루어주신 것이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은혜로 메이탈의 어머니가 치유되자 나는 메이탈의 부모님과도 무척 친해졌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나는 메이탈을 우리가 출석하는 교회로 몇 차례 이끌 수 있었다.

한번은 텔아비브에서 사역하는 한인 선교사가 아토피로 심하게 고생하는 딸을 데려온 적이 있다.
이 아이는 아토피가 워낙 심해서 아이가 다니는 이스라엘 학교에서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지경이었다.
나는 이 아이에게도 체질에 따른 사암침을 놓았다. 그런데 단 한 번의 치료만으로도 아토피 증세가 눈에 띄게 호전되는 효과가 나타났다.
그러자 그 아이가 다니는 이스라엘 학교에 나에 대한 소문이 난 모양이었다. 그 후로 얼마 동안 아토피 환자들이 계속해서 나를 찾아왔다. 개중에는 돌도 안 된 갓난아이도 있었다.
물론 내가 치료한 모든 환자들에게 기적적인 효과가 일어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이스라엘이라는 선교지에 와서 침을 놓으며, 특별히 하나님께서 치유의 은혜로 함께하시는 것을 깊이 느꼈다.

•우등생으로 박사과정에 입학하다

당시 나는 석사 준비 과정, 석사 본 과정을 마치고 조심스럽게 박사 과정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아서 연구비 조달이 힘들어졌기 때문에 각 연구실마다 박사 과정의 문은 그리 넓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스라엘 학생들이 우선이고 나 같은 외국인 학생은 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박사 과정의 문을 활짝 열어주셨다. 더 놀라운 것은 박사 과정 학생들에게 매달 지급되는 연구비였다.
박사 과정 학생들은 평균적으로 매달 100퍼센트에서 120퍼센트(900~1000불 정도)의 연구비를 받는다.
그런데 내게 박사 과정의 문을 열어주신 세 분의 교수님은 각각 50퍼센트씩, 총 150퍼센트의 연구비를 지급하겠다고 하시는 게 아닌가!
게다가 학교에서 100퍼센트의 장학금이 추가로 지급되는 상황이 되었다. 할렐루야! 석사 과정을 마칠 때 쓴 졸업 논문이 기형학 관련 저널에 실렸고,
또 28학점을 이수해야 하는 석사 과정의 평균 점수가 높았기 때문이다.
나는 히브리대학교 의과대학의 박사 과정 학생 중에서도 유일하게 총 250퍼센트라는 어마어마한 연구비를 받으며 박사 과정에 들어가게 되었다. 첫 두 달간은 250퍼센트의 연구비를 받았다.
하지만 박사 과정 학생의 연구비 지원이 200퍼센트로 제한되어 있어서, 4년간 매달 200퍼센트의 연구비를 받으며 박사 과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하나님은 역시 그분을 찾고 굳게 신뢰하는 자에게 상(賞)을 주시는 신실한 분이셨다.

석사 준비 과정 때 7과목에서 27학점을 받아야 해서 하늘이 노래졌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동안 힘겹게 보낸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 보면 위기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도우셨다. 석사 준비 과정 때였다. 재시를 보기 전날, 나는 담당 교수님을 찾아가 시험 문제를 영어로 번역해달라고 부탁드렸다.
히브리어로 된 다섯 장이나 되는 문제를 두 시간 만에 풀어야 한다는 것이 내게는 엄청난 중압감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첫 시험 때 문제를 읽다가 이해가 안 되어 읽고 또 읽으면서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마지막 다섯 문제는 그냥 찍어서 헐레벌떡 답안지를 냈다. 하지만 재시는 내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다.
나는 교수님께 간곡히 부탁했다.

“제발 영어로 번역해주세요.”

내 절실함이 통했던 걸까? 교수님은 나 혼자 보는 재시험을 위해 문제를 친히 영어로 내주겠다고 했다. 나는 염치없게 하나 더 부탁했다.

“제한 시간을 두지 말아주세요. 제가 다 풀 때까지 기다려주세요.”

교수님은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보였다. 그러더니 한참 나를 쳐다보고는 불쌍히 여겨졌는지 이 요청도 흔쾌히 들어주었다.
그렇게 나는 첫 시험에서 탈락한 과목의 재시를 영어로, 그것도 시간제한 없이 무려 다섯 시간 동안 시험을 보았다. 결과는 84점으로, 첫 과목을 무사히 통과했다.

나는 석사 준비 과정으로 부여받은 27학점을 세 학기에 걸쳐서 힘겹게 통과했다.
그런데 이때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아셀 교수님의 연구 프로젝트는 석사 과정을 졸업하기 위해 실험 점수를 받아야 하는 필수 코스였다.
물론 세 학기가 지났을 때 실험도 거의 끝났고 논문도 거의 완성되어 기형학 저널에 넘기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나는 석사 과정 졸업을 위한 28학점의 코스웍(course work)은 시작도 하지 못한 상태였다. 한마디로 언밸런스(unbalance) 상태였다.
교수님은 내게 최대한 빨리 코스웍을 마치라고 다그치기 시작했다.
석사 준비 과정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았기 때문일까. 나는 석사 과정 졸업을 위한 28학점의 코스웍이 너무 쉽게 느껴졌다.
일단 석사 과정의 과목들은 시험이 없고 페이퍼나 프레젠테이션만으로 점수를 주기 때문이다. 시험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엄청난 해방감을 느꼈다.
나는 28학점의 코스웍을 한 학기에 모두 신청했다. 이를 본 유대인 친구들은 나의 무모한 시도를 극구 말렸다. 그것은 이스라엘 학생이라도 감당하기 힘든 불가능한 미션이라는 것이다.
친구들은 마치 나를 돈키호테 보듯 쳐다보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내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에이 말도 안 돼, 이스라엘 학생도 2년에 걸쳐서 하는 28학점의 코스웍을 한 학기에 모두 마친다고?”

코스웍을 최대한 빨리 마치라고 다그쳤던 아셀 교수님도 내 수강신청서에 최종 사인하는 것을 주저했다.

“교수님, 한번 해볼게요. 자신 있어요.”

교수님은 긴가민가하며 사인을 해주셨다. 솔직히 한 학기 안에 28학점의 코스웍을 다 넣는다는 것은 일단 시간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래서 나는 같은 시간대에 두 과목을 신청하는 무리수를 뒀다. 이럴 경우 출석이 필수인 과목을 우선적으로 듣고, 출석 체크를 안 하는 과목은 간혹 수업에 모습을 드러내는 식으로 한 것이다.
나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며 마지막 한 한기를 보냈다. 그리고 무사히 28학점의 석사 과정 코스웍을 끝냈다.
바로 이때 점수가 좋아서 박사 과정에 올라갈 때 학교로부터 100퍼센트의 장학금을 추가로 받게 된 것이다. 할렐루야!
내 눈에서 기쁨과 감격의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유대인들에게 사상의학을 가르치다

하나님의 은혜는 박사 과정에 올라가서도 계속되었다. 당시 아셀 교수님의 연구실에서는 실험을 할 때 보통 샘플의 수가 500개를 넘지 않았다.
그런데 박사 학위 첫 프로젝트로 받은 나의 연구는 세 분의 지도교수님 아래에서 하는 통합 프로젝트라 압도적으로 많은 2,000개의 샘플 수가 필요했다.
하루에 10개씩 검사하는 재래식 실험 기법으로 2,000개가 넘는 샘플을 검사하는 것은 시간 낭비였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실험 기법을 찾아 고민했다.

그때 나는 최신 연구 논문들을 뒤적거리다가 96개의 샘플을 동시에 검사하는 ‘웰’(Well)을 보았고, 이 방법을 내가 하는 프로젝트에 적용해보았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 실험 기법대로 할 경우 하루에 200개에서 300개의 샘플을 거뜬히 검사할 수 있었고, 또 기존의 기법보다 오차율도 현저히 낮아졌다.
이후 실험실에서는 내가 고안해낸 이 기법을 보편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새로운 실험 기법을 적용하니 2년으로 계획한 실험 프로젝트가 6개월 만에 끝이 났다.
세 분의 지도교수님은 무척 만족해하며 이 실험 결과를 당뇨병 관련 저널에 보냈고, 몇 번의 수정을 거친 끝에 실리게 되었다.
세 분의 지도교수 중 한 분인 코헨 교수님은 내게 재미난 농담을 던졌다.

“리오르(나의 히브리식 이름, “그분의 빛이 나에게”라는 뜻)! 너 이러다가 남들은 4,5년이 걸리는 박사 과정을 1년 안에 마치겠다.”

그러나 나는 박사 과정을 빨리 마치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4년간 내가 받을 수 있는 200퍼센트의 장학금을 꼬박꼬박 받으며, 학생으로서 비자를 안정적으로 연장하고,
이스라엘에 남아 계속 사역하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이다. 첫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친 이후 나는 4년의 시간에 맞게 실험 속도를 조정해가며 보냈다.
그즈음 나는 공부에 대한 부담도 많이 줄고 학생으로서의 생활도 완벽하게 적응하게 되어, 꾸준히 집으로 찾아오는 유대인 환자들을 돌보며 관계 전도를 계속해나갔다.
그러면서 유대인 한의사인 엘리에게 한국의 독창적인 한의학인 사상의학(四象醫學)을 가르치기도 했다.
엘리는 태권도를 비롯해 한국 문화에 유독 관심이 많은 유대인 한의사였다.
이스라엘에 있는 한인을 통해 태권도를 배우던 엘리는 한국에서 온 한의사가 있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는지 먼저 내게 만나자고 연락해왔다.
그리고 직접 만났을 때, 엘리는 중국에서 한의학을 배울 때 한국의 사상의학에 대해서 귀동냥으로 들은 적이 있다며 일대일로 사상의학을 가르쳐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했다.
나는 그 후 2년 동안 사상의학의 원전인 이제마의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을 가지고 엘리를 가르쳤는데, 참 신기하게도 엘리는 한자에도 익숙할 뿐만 아니라 수업을 잘 소화해냈다.
나중에는 한국의 독특한 한의학인 사상의학을 유대인들에게 알리는 책을 엘리와 함께 공저로 출간하기도 했다.
엘리는 내게 침술에 관심이 많은 유대인 마사지 치료사 그룹을 연결해주었고, 나는 그들을 모아 침술의 기초가 되는 ‘경혈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한편 사상의학을 임상에 적용하여 탁월한 효과를 본 엘리는 이스라엘에 한의학 학교를 함께 세워보자고 내게 제안해왔다.
지금 있는 중국계 한의학이 아닌 한국 한의학 학교를 세우면 충분히 경쟁력이 있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
프로젝트가 진행되면서 나는 엘리와 함께 한국에 가서 경희대 한의과대학 학과장이신 안규석 교수님과 한방병원장인 류봉하 교수님을 만났다.
우리가 이스라엘에 세울 한의학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에게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의 수료증을 발급해줄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감사하게도 학교 측에서는 흔쾌히 승낙해주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스라엘 정부와 협상이 되지 않아 이 프로젝트는 실현되지 못했다.

•청천벽력 같은 암 판정

2010년 7월, 나는 아내와 두 아이를 데리고 한국을 방문했다. 그동안 나는 세미나 인도차 한국을 자주 방문했지만, 아내와 두 아이에게는 실로 5년 만의 방문이었다.
아내는 이번 기회에 가슴에 있는 양성 종양을 제거하기 위해 선교사 지정 병원인 세브란스 병원을 찾았다.
양성에서 악성으로 변하지 않았는지 여부를 체크하기 위해 이스라엘에서 6개월에 한 번씩 하던 초음파 정기 검진이 번거롭기도 했지만,
비용도 너무 비싸서 이번 기회에 아예 깨끗하게 제거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별 생각 없이 찾아간 병원에서 우리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양성 종양 제거를 위해 정밀 검사를 하던 중 멀쩡하던 반대쪽 가슴에서 악성 종양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의사는 아직 초기임을 강조하며 우리 부부를 안심시켰지만, ‘암’이라는 진단 결과는 우리를 공포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서너 가정당 한 명이 암 환자일 정도로 암이 흔해진 세상에 산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내 아내가 암이라니! 나는 이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아내도 옆에서 할 말을 잃은 채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이스라엘에서 보낸 11년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11년간 사역하고 5년 만에 한국을 방문한 것인데, 그 기쁨을 만끽할 새도 없이 이런 소식을 듣게 되다니….
우리는 슬펐다. 아니, 잔인하게 느껴졌다. 그동안 참으로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다. 그렇지만 이때 떠오른 생각은 단 하나였다.

‘지금까지 받은 은혜를 다 거두어 가셔도 좋으니, 제발 아내만은 고쳐주세요!’

나는 하염없이 우는 아내를 위로하며 애써 눈물을 참았다. 그러나 이재훈 목사님께 전화를 한 순간, 끝내 참았던 눈물이 북받쳐 나왔다.
목사님은 안타까워하며 조심스럽게 이제 한국으로 돌아오면 어떻겠느냐고 말씀하셨다.
그날 저녁, 3일간의 청소년 수련회를 마친 아들 찬영이를 데리러 용인의 명지대학교 기숙사에 갔다가 이재훈 목사님 부부를 만났다. 아내는 사모님의 품에 안겨 한참을 흐느끼며 울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죠?”

나는 하나님의 뜻을 묻고 또 물었다. 원래 한 달 일정으로 한국에 나온 것이기에 아내는 하루빨리 수술을 받고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가고자 했다.
하지만 나는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게 ‘강제 안식년’을 시키기 원하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스라엘에서 사역하는 11년의 시간 동안 안식년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하나님께서 이번 기회에 우리 가정에게 강제로 쉼을 주시려는 것 같았다.
더욱이 이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내게는 엄청난 사역보다 아내의 건강 회복이 더 시급하고 훨씬 소중했다.
만약 아내의 질병이 아니었다면 우리 가정은 이스라엘을 떠난다는 생각을 해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아내를 설득했고 아내도 내 뜻에 따랐다. 우리는 한 달 후 이스라엘에 가서 짐을 정리했다. 초등학교 5학년을 마친 딸 현지는 한국에 데려가기로 결정했지만,
중학교 3학년인 아들 찬영이는 도저히 한국 학교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 독일에 있는 MK(선교사 자녀) 기숙학교에 데려다 놓고 하루 만에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모든 것이 전광석화처럼 내려진 결정이었다.
11년간 헌신했던 사명의 땅 이스라엘을 떠나기 위해 짐을 싸면서 나는 이 땅에서 보내는 우리의 삶이 진실로 ‘순례자’의 삶임을 고백했다.
하나님이 가라고 하시면 가고, 멈추라 하시면 멈추고, 또 쉬라 하시면 쉬고, 그렇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순례자의 삶이 우리의 인생이다.
그리고 이 땅에서 순례의 삶을 마치고 나면 우리에게는 영원한 안식이 있는 천국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온 우리 부부 앞에는 또 다른 중요한 결정이 남아 있었다. 유방암 수술 문제였다.
병원에서는 초기니까 빨리 수술하자고 했고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큰일 난다며 협박 아닌 협박을 계속했다.
하지만 우리 부부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불신자 같으면 아무 고민 없이 수술하고 말 문제겠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고난에는 분명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었기 때문이다.
아내는 유방암 수술 문제를 놓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위해 금식기도원에 들어갔다.
결국 우리 부부는 수술을 잠시 미루고 최대한 공기 좋은 곳에 집을 구해 요양을 하며 하나님께 매달리기로 했다.
그리고 3개월마다 검진을 하면서 조금이라도 악화되는 기미가 있으면 그때 가서 지체하지 않고 수술대에 오르기로 했다.
한국에 데리고 온 딸 현지는 유럽 코스타 집회에서 알게 된 김요셉 목사님의 배려로 수원 중앙기독초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성격이 무척 활발한 현지는 친구도 금세 사귀면서 생후 10개월에 부모의 품에 안겨 멋모르고 떠난 고국생활에 정말 잘 적응해주었다.
특히 감사했던 것은 암 진단을 받고 아무 경황도 없이 독일에 훌쩍 떼어놓고 온 아들 찬영이가 갑작스런 환경 변화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믿음직스럽게 잘 자라주었다는 것이다.
나는 아내와 새벽기도를 하고 아침저녁 하루 두 번씩 아파트 단지 내 운동 코스를 돌며 운동을 했다. 식사는 철저하게 암 환자를 위한 특수 식단으로 바꾸었다.
그렇게 1년 반의 시간을 보내고 보니 우리 부부는 하나님과도 가까워지고 무엇보다 부부 사이가 더욱 친밀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무래도 암이라는 질병을 안고 함께 기도하다보니 기도가 더 간절해질 수밖에 없었고, 더 친밀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던 것 같다.